[시니어 철학산책] ⑪ 악의 평범성, 생각하지 않는 죄

한나 아렌트가 바라본 아이히만이 유죄인 이유

허민찬 기자 | 기사입력 2020/06/24 [11:40]

[시니어 철학산책] ⑪ 악의 평범성, 생각하지 않는 죄

한나 아렌트가 바라본 아이히만이 유죄인 이유

허민찬 기자 | 입력 : 2020/06/24 [11:40]

 

 

[백뉴스(100NEWS)=허민찬 기자] 8개월간의 재판을 기록한 책이 있다. 유대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재판에 참관하여 쓴 기록으로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유럽 전역에 있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다. 유대인은 주로 아우슈비츠 같은 포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었다. 유럽 전역에 있는 600만 명의 유대인을 색출하고 분류해서 포로수용소로 이송하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수송 작업의 총 책임자가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종전 후 숨어 살다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추격 끝에 납치되어 재판을 받았다. 1961년 12월 아이히만의 첫 전범 재판이 열린다. 재판에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600만 명을 죽인 살인마 아이히만이 너무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던 까닭이다. 

 

아이히만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 사람들은 그를 사이코패스나 미친놈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재판에 등장한 아이히만의 모습은 평범하게 그지없었다. 더욱이 그는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고, 가정이 있고 가정에서 굉장히 자상한 아버지였다. 

 

아이히만은 재판 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유대인을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었다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저 국가가 시킨 일을 성실히 처리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주장이 합당하다면 아이히만은 국가가 맡은 일에 성실한 시민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유대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었다.

 

아이히만의 자기변호를 본 한나 아렌트는 악한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누구나 특수한 상황에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은 어디에나 있고,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이 평범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 명제가 악의 평범성이다.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객관적으로 인지할 능력을 상실하기도 한다. 아이히만 재판의 쟁점은 그가 그저 시키는 대로 일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담당 검사는 명령이 잘못되고 불법적인 경우, 명령을 마지못해 따르는 것도 불법적인 행위로 성립된다며 아이히만의 변명을 일축했다. 

 

만약 아이히만의 자기변호가 합당하다면, 아이히만은 무죄였는가.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생각한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의 무능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근면성은 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의 시선에서 그것이 바로 아이히만의 죄였다.

 

8개월간의 재판 끝에 아이히만에게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가 유대인을 죽이려고 의도한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후 그가 옛 나치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인 빌렘 사센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나치 사상과 유대인 학살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드러났다. 그는 단순히 명령을 수행한 자가 아니었고, 유대인 학살에 의지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아이히만의 재판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명제로 철학에서 다루어진다. 또 행정학에서도 다루어지는 재판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했을 뿐이다.’ 비단 아이히만만이 주장한 변호는 아닐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한 일의 책임은 상급자에게만 있는가. 그 일의 비도덕적성을 묵인한 수행자는 아무 잘못도 없는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한나 아렌트는 악행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는 점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점을 깨닫는다.

100뉴스(제주)
허민찬 인턴기자
ksh@confa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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