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문화산책] 69세 여성의 외침…“저도 성폭행 피해자입니다”

노인의 존엄성 다룬 영화 ‘69세’…노인 여성대상으로 한 성범죄-노인 혐오 나날이 늘어가

김이슬 기자 | 기사입력 2022/03/2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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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문화산책] 69세 여성의 외침…“저도 성폭행 피해자입니다”
노인의 존엄성 다룬 영화 ‘69세’…노인 여성대상으로 한 성범죄-노인 혐오 나날이 늘어가
기사입력: 2022/03/2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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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69세(감독 임선애)' 포스터.  © 사진=엣나인필름

 

“다리가 예쁘세요. 수영하셔서 그런가. 뒤에서 보면 꼭 아가씨 같아요.”

 

깜깜한 화면 저편에서 끈적한 추행이 들려온다. 이윽고 타이머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69세 효정(예수정 분)은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던 중 29세 남자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 분)에게 치욕적인 일을 당한다. 끙끙 앓던 효정은 동거 중인 시인이자 헌 책방주인 동인(기주봉 분)에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 효정은 동인과 함께 경찰서에 가서 가해자를 신고한다. 

 

그러나 어쩐지 사건은 여타 성폭행 사건과 다르게 진행된다. 신고받은 경찰관들은 미온적으로 사건 처리를 한다. 심지어 그들은 효정에게 “기억의 오류가 있는 것 아니냐”, “친절이 과했네” 등 2차 가해를 서슴없이 행하면서 치매 검사를 권하기까지 한다. 법원 역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노인 여성 효정의 용기는 무참히 짓밟힌다. 

 

노인의 존엄성을 다룬 독립영화 ‘69세(감독 임선애)’의 얘기다. 영화 ‘69세’는 ‘제22회 타이베이영화제’ 퓨처 라이트(Future Lights) 섹션, ‘이스라엘 하이파 국제영화제’ 인터내셔널 파노라마(International Panorama) 섹션 등에 초청된 바 있으며,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박남옥 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효정에게 쏟아졌던 날 선 눈초리는 영화 밖에서도 여전히 존재했다. 개봉 당시 영화 평점 테러가 쏟아졌던 터다. 개봉 직후 일부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비난과 함께 낮은 평점을 줬다.  

 

노인 여성은 성적 매력이 없어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영화 안팎의 시선은 말도 안 되는 소설일 뿐인가. 효정과 같은 끔찍한 상처를 공유하는 이들의 사례는 인터넷 창에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쉽게 그리고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영화 ‘69세’만 해도 지난 2012년 8월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은 60대 여성이 30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해 고발했지만, 영장은 네 번이나 기각됐다.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아갔고, 경찰도 나이 차이 탓에 피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피해자는 A4 다섯 장에 달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쳤다. 피해자는 유서에 “내가 젊은 여자였다면 가해자가 구속됐을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죽음으로밖에 결백함을 증명할 수 없었던 노인 여성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 영화 '69세(감독 임선애)'에 출연한 배우 예수정의 모습.  © 사진=엣나인필름


안타까움과 별개로 현실에 효정 씨들은 더욱 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60세 이상 고령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2016년 599건에서 2020년 873건으로 약 45.7%가 늘었다. 5년간 발생한 총 범죄 건수는 3,750건으로 매일 1명 이상의 노인이 성범죄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드러나지 않은 노인 대상 성범죄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신고가 어려운 치매 환자나 부족한 환경에 놓인 피해자를 겨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피해자들은 수치심이나 부담감을 호소하며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길 꺼린다.

 

임선애 감독은 이런 마주하기 불편한 진실에 카메라를 깊숙이 들이댄다. 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노인 여성을 무성적(無性的) 존재로 보는 사회적 편견, 이를 악용해 노인 여성을 성범죄 타깃으로 삼는다는 현실이 충격적이었다. 성폭력 사건은 많이 영화화됐지만, 노인 여성 상대 성범죄는 국내외적으로 거의 다뤄진 적이 없더라. 창작자로서 남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과 함께 누군가 운을 떼야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했다”며 연출 의도를 밝혔다. 

 

그간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들은 있었으나 노인 여성을 다룬 영화는 전무했다. 영화 ‘69세’는 사회 주류에서 빗겨나 있는 노인 여성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폭력으로부터 무방비로 노출된 노인 여성이 뒤틀린 사회적 시선과 편견에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나 묵묵히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노인이 됐다고 해서 무성적(無性的) 존재로 변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극 중 효정은 “제 얘기가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며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 그를 보고 있자니, 현실의 효정 씨들 또한 더 이상 그늘에서 숨어지내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조심스레 품어본다. 

 

▲ 영화 '69세(감독 임선애)'에 출연한 배우 기주봉의 모습.  © 사진=엣나인필름


영화에는 효정이 겪은 직접적인 사건 이외에도 노인 여성을 바라보는 어그러진 사회적 시선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극 중 효정은 패션 감각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다. 간병인 일을 하는 효정에게 사람들은 “간병인답지 않게 옷을 너무 멋지게 입으세요~”, “나이에 비해 몸매가 좋으세요~” 등의 칭찬 같지 않은 칭찬 따위를 건넨다. 이처럼 효정이 옷에 집착하게 된 것은 노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않기 위해 스스로가 선택한 방어기제다.

 

이런 차가운 눈길은 노인 여성뿐만 아니라 노인 남성에게도 마찬가지다. 효정의 동거인 동인은 노인을 향한 홀대에 결국 “너희는 나이 안 먹을 줄 알아?”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틀딱(틀니를 딱딱거리는 노인)’, ‘노인충(노인+벌레)’, ‘할매미(할머니+매미)’ 등 노인 혐오 표현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오늘날이기에 동인의 목소리가 더욱 가슴에 꽂힌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젊은 세대는 노인 부양 복지 비용이 증가하고, 노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노인 혐오로 드러나게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21년 국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전체인구의 16.5%를 차지했다. 2025년에는 20.3%에 달할 것으로 전망돼 초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혐로(嫌老) 속도에도 가속화가 붙었다. 그저 손 놓고 바라볼 문제가 아니다. 세대 간의 갈등을 좁히기 위해 각 세대 모두 노력해야 한다. 서로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북라이브=김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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